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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대사의 숨겨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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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KBC
댓글 0건 조회 21회 작성일 26-07-25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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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직 CIA 요원 (마이클 리 박사 증언 -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 하는 사건들; 우리의 악마를 우리가 키웠다; 북한의 허세정치 허탈경제; 죽어가는 김정일을 남한이 살려주었다; 대북 경제지원은 체제강화, 인민들에게는 독약; 김정일의 허세정책과 허탈경제)

 1. 1984년 홍수와 김정일의 허세 

1984년 대홍수로 남북한 공히 그 피해가 엄청나게 컸다. 북한은 그 피해복구에 힘이 들었고 남한은 그래도 저력이 있었다. 그때 남한의 전두환 대통령이 북한에게 홍수피해 복구지원을 제안했으나 김정일이 북한 자력으로 복구가 가능함으로 <남한의 지원 따위는 필요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북한에서 남한에게 홍수피해 복구를 지원하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김정일의 생각에는 자기가 거절을 했기 때문에 남한도 자존심 때문에 분명히 거절을 할 것이라고 계산을 한 것인데, 이게 웬일이야, 전두환 대통령이 북한의 지원을 받겠다고 수락하였다. 김정일의 허세와 잔꾀가 스스로 만든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1984년은 북한의 제2차 7개 년 경제계획의 마지막 해이고 일본과 서독의 차관 상환도 못하고 있었으며 경제가 회생 불가능한 지경에서 홍수 피해까지 덮친 마당에 김정일이 해결 대책이 없어서 부수상 김환을 급히 중국에 파송하고 도와 달라고 애원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중국은 현물지원을 거절하고 그 대신 북한의 채무 일부를 탕감하는 것으로 끝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김정일이 군량미 창고를 털고 쌀과 광목을 인천을 경유 남한에 보냈다. 그때 남한에서는 접수한 북한의 쌀이 창고에서 오래 묵어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고 동물의 사료로 썼으며 광목은 잘라서 부엌에서 쓰는 행주와 앞치마 감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 뒷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1997년에 황장엽과 함께 망명한 김덕홍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이 그 군량미 창고를 다시 채우는데 9년이 걸렸으며 민생경제는 바닥이 났고, 식량배급이 그로인해 중단이 되었으며,1994년 김일성이 죽기 전에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민족정서에 호소하여 남한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받으려고 꿈을 꾼 것도 그 후유증의 한 실례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북한의 경제가 본격적으로 휘청거리가 시작하였다고 한다.

2. 제13차 세계 청년-학생 체육대회 

북한이 88올림픽 남북한 공동주최를 요구했으나 실패하자, 어떤 형식이건 남한에 지지 않겠다고 허세를 부리며 계획한 것이 바로 1989년의 <제13차 세계 청년-학생 체육대회>이었다. 이 대회는 최용해를 대회준비위원장으로 하고 1989년 7월 1-8일 평양에서 열렸고 총비용 60억 불을 사용했다. 총 180개국에서 1만 6000명이 참석 하였다. 남한에서는 전대협 학생대표로 임수경이 이 대회에 참석 하였다. 1988년 2월 22일 노동당 정치국 회의에서 김정일이 제안을 했고 1988년 9월 9일까지 <200일 노력동원 전투계획>을 발표하고 체육대회관련 260개 시설 건축에 들어갔다. 이 계획에 포함된 중요한 시설은 아래와 같다. 순천 비닐론 공장 재건 , 김책 제철소 확장 공사, 전국각지에 중소형 수력발전소 건설, 15만명 수용 메이데이 체육관 건설, 양각도 축구경기장 건설, 평양 국제영화관 건설, 동평양 대극장 건설, 평양 써커스 공연장 건설, 105층 유경호텔 건설 등, 이 일들을 추진하기 위하여 김정일은 1988년 2월 27일 김일성 광장에 10만 명의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군중대회를 개최하였으며 그 후에도 유사한 군중대회를 37회나 더 법석을 떨었다. 메이데이 체육관은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의 두 배 크기로 설계를 하였다. 그러나 비날론 공장과 유경호텔 건설은 그 후 기술문제로 중단 되었다. 그때 이 대회에 참석한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증언에 의하면, 평야시민들이 총동원되어 도시청소로 법석을 떨었고 낡은 건물에 페인트칠을 하고, 5만여 명의 젊은 애들이 매일같이 매스게임 연습을 하느라 초죽음이 되어 있었고, 상점과 환전소마다 선전용 고급상품을 진열해놓고 있었으나 시민들은 아무도 못 사게 하였다한다. 성혜랑의 말은, “그것 다 선전용 허풍잔치인 것이 눈에 보였어요. 평양시내에 coffee shop 하나 없는 나라를 외국인들이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북한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생각하면, 이 대회는 분명히 국력낭비의 허세였다. 이 대회 이후로 북한의 경제는 9년간 계속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하였다.

 3. 금수산 태양궁전 보수와 300만의 아사 

<금수산 태양궁전>은 평양근교 금수산 자락에 세워진 초화화 건물이다. 1973년 3월에 착공하여 1977년 4월 15일 김일성의 65세 생일 선물로 헌납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처음에 김일성의 관저로 사용되었고 <금수산 의사당> 또는 <주석궁>으로 불리었다. 이 건물은 350만 평방미터의 대지위에 9만 평방미터를 차지하는 3층 대리석 건물로 인도의 <타지마할>에 방불한 호화한 건물이다. 건물 앞 광장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을 상징하는 415m x 216m 로 되어있다. 김일성 사망 후 1994-1995 에 김정일이 애비의 시신을 방부처리하고 영구보존하기 위하여 러시아에서 전문기술자들을 불러들였고 3층에 시체안치 지성소 구축과 건물외벽 장식에 8억 9000만 불을 사용하였다. 건물의장에는 학과 구름이 양각된 70만개의 세계 최고급 어영석 블럭을 부착하였으며 지성소 출입문 손잡이는 순금으로 되어 있다. 이때 북한에서는 인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300만 이상이 아사하였고, 그 돈으로 식량을 수입 하였다면 전 국민이 3년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한다. 그때 그 공사 중에 김정일의 평양 집무실과 통하는 지하 갱도를 건설하는데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과로와 사고로 죽었는데 그런 사실을 보도한 일도 없고 문제제기한 간부는 한사람도 없었다. 이 작업 이후에 그 건물은 <금수산 기념궁>으로 불리었다. 2011년 12월에 김정일이 죽은 후에 그도 동일한 방법으로 방부처리 되고 시신은 애비가 누어있는 지성소 옆자리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건물은 <금수산 태양궁전>으로 개칭되었다. 이때에도 방부처리와 유리관 속에 안치 하는데 약 100만불을 사용하였다. 그 이후에도 러시아에서 불러온 전문가들이 수시로 점검관리 하며, 두 독재자들의 시신을 보존하고 시설관리와 보안경비와 행정비용과 관계인원들의 급료와 기타 비용 합계가 매년 약 1억 6000만불에 달한다고 하니, 인민들이 6개월간 먹을 수 있는 양식을 구할 돈이 두 사람의 독재자 시신 보관에 매년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도 북한은 다른 나라에 경제 원조를 애걸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분노하지 않으면 우리도 그들과 동일한 공범자들이다. 

4. 고난의 행군과 심화조 사건

1995년에 북한은 또 한 번의 폭우 홍수피해를 입었다. 그해 알곡생산은 3백45만ton으로 수요량에서 약 130만ton이 부족했다. 다른 대책이 없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 되었다. 김덕홍의 증언에 의하면, 1996년 11월 현재 아사자가 100만이 넘었고 계속해서 총 300만 이상이 북한에서 굶어죽었다. 그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북한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김정일의 권력유지를 위한 허세정책과 국력낭비에 기인했다는 것이다. 1984년에 남한에 홍수피해 복구물자 원조, 1989년 세계 제13차 청년-학생 체육대회 주최, 그것 다 김정일의 허세였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일의 위상이 당과 인민들 사이에서 겉잡을 수 없이 추락하고 있을 때, 경제적인 대책을 모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동향 단속을 위한 사상검열을 강화 하였다. 주민등록사업을 구실로 <사상검열 심화조>를 조직하고, 국가보위부가 아닌 <사회안전부>에서 약 6000명의 심화조 조사관들을 차출하고 1997년 초부터 전국각지에 들어가 사상불순분자들을 색출하고 처형 또는 정치범 수용소로 보냈다. 그러나 엄격한 표준이나 지침이 없이 심화조 조사관들이나 관계간부들이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사람들을 불순분자의 탈을 씌워 억울하게 처단한 예가 너무 많아 사회적인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농업담당 당 비서 서관희 처형사건이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은 후에 심화조 활동은 1998년에 종료되었고 2000년 1월에 해체되었으며 2000년 4월에 사회안전부는 국방위원회 직속 인민보위부로 개편되었다.

5. 황해 제철소 이야기 

황장엽의 망명은 김정일의 정치적 위상에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전직 통전부 간부 탈북자 장철현의 말에 의하면, 북한인민들 태반이 김정일에 대한 원한이 극에 달하고 있었으며, 김정일의 시대는 빨리 끝나야한다고 할 정도로 황장엽 망명의 후폭풍이 심하게 휘몰아칠 때, 또 하나의 무서운 일이 터졌다. 1998년 8월 황해보북도 송림시 (옛날에는 겸이포)에 있는 황해제철소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노동자 10만명이 일하고 있는 <황해제철소 종합기업소>의 노동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매일같이 60-100명의 아사자 시체가 공장을 떠나게 되는데, 기업소 총지배인 포함 8명의 간부들이 합의하여 철강제품 얼마를 중국에 팔고 강냉이를 사다가 노동자들에게 먹여 살렸다. 그 당시 그곳 노동자출신 탈북자 이춘구의 증언에 의하면, 이 일을 알게 된 김정일이 “철강재는 군수품인데 너희들이 나의 승인도 없이 맘대로 팔아먹어, 이것은 국가반역죄다”라고 하면서 그 8명의 간부들을 공개처형 하였다. 수 천 명의 노동자들을 광장에 모아놓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을 집행하는데, 40대중반의 젊은 여성 한사람이 자리에서 뛰어나가 그 잔인한 처사에 항의하였다. 그녀는 과거에 김일성 수행 간호사 출신으로 당당하게 외쳤다. <당에서 양식을 주지 안 해서 우리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하여 양식을 사다 먹었는데, 그것은 애국적인 일이지 어째서 국가반역죄냐. 처형이라니 이건 너무하다.> 이때, 무장경비원들이 그녀를 끌고 가서 기둥나무에 묶고 총으로 쏴 죽였다. 그리고 8명의 공개처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 공장에서 반 김정일 봉기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다음날 공장 마당에 수 백 명의 노동자들이 집결하여 연좌데모를 시작하였다. 반 김정일이나 반당 반정부의 구호 같은 것은 전혀 없었고, 다만 <먹을 것을 주시오> 하는 외침뿐이었다. 그들은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고, 인원수는 천여 명으로 늘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군대의 탱크 4대가 기습하여 데모대원들을 깔아뭉갰다. 수 백 명이 즉사했고 생존자들은 체포되어 후에 인민재판을 받고 공개처형 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졌다. 이 일은 어디에서도 보도된 일이 없었으며, 필자가 2017년 영등포에서 김재동 목사가 주재하는 전국 교회대표자들이 모인 <에스더 기도회>에서 강연으로 발표하였고 참석자들이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그때 좌중에서 탈북자 여성 한분이 앞으로 뛰어 나와 고성으로 외쳤다. <그게 모두 사실이요. 내가 그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 황해제철소 노동자였소.>

6. 김정일 구원의 바람이 남쪽에서 

지금까지 밝힌 사건들을 분석하면 북한의 경제는 회생 불가능한 지경까지 갔었다. 그리고 김정일의 정치적 입지는 아주 위태 위태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김정일 구원의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왔다. 그것은 남한의 현대그룹 정주영 (1915.11.25.-2001.3.21.) 회장이 강냉이 10만 톤과 1998년 6월과 8월 2차에 걸쳐, 현대자동차회사가 특별히 제작한 트럭 100대에 소 1001마리를 신고 북에 들어가 김정일에게 바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놓고 남북화해를 위해 아주 멋있는 쾌거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 일은 도와줘서는 안 될 계산착오의 엉뚱한 짓 이었다 (miscalculated escapade). 이 일은 1998년 2월 25일에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의 꼬임에 얽혀든 <햇빛정책>의 서곡(overture)이었고 남북관계의 본질에 위배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그때 북한은 정주영회장과 동행한 그의 아들 정몽헌과 금강산 사업을 토의하였고 현대그룹은 금강산 개발권을 따기 위해 9억불을 퍼부었다.다 죽어가는 김정일을 살려주는 돈방석이 된 것이다. 그 결과로 금강산 관광사업이 시작되고 1998년 11월 18일에 첫 번째 <금강호>가 관광객을 신고 북으로 들어갔다. 이 모든 일을 위하여 현대그룹이 퍼부은 총비용은 41억7천700만원 이었다. 그리고 2000년 8월에는 남북 양측이 개성공단 개설에 합의하였다. 다 죽어가는 북한을 남한이 살려주었다.

7. 남한의 대북 경제지원과 잘못된 통일개념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김대중은 4억5천만불을 김정일에게 바쳤다. 그리고 그 당시 국정원장을 역임한 임동원은 <김대중 대통령이 실정법에 어긋남이 있더라도 송금을 추진하라고 지시하였다>고 증언하였다. 2008년 9월 30일자 <동아닷컴>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역대정부가 북한에 제공한 경제원조 액수는, 김영삼 정부가 2266억원, 김대중 정부가 2조 7028억원, 노무현 정부가 5조 6777억원, 이명박 정부가 2113억원, 총 8조 8184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한이 제공하는 모든 형태의 경제지원과 금강산 사업이나 개성공단을 통하여 발생하는 수입은 모두 39호실 수령경제 계좌에 흡수되며 그 돈은 전액이 김일성 일가의 독재체제유지와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사용되었다고 미국의 의회조사국이 발표하였다. 그런데 한국에는 아직도 개성공단과 금강산 사업의 재개를 주장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우리가 남북관계를 말할 때, <화해 평화 통일>을 자주 언급하는데 그 속에는 엄청나게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화해>라면, 북한이 아무리 양보를 한다 해도 그들의 이념적 지분을 우리가 인정하고 수용해야 하는데,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평화 또는 통일, 그 평화가 북한이 원하는 방식의 평화냐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평화냐를 분명히 해야 한다. 통일도 마찬가지, 어느 쪽이 원하는 통일이냐를 구별해야 한다. 무조건 화해, 평화, 통일을 부르짖는 어리석은 주장은 아주 위험하다. 우리는 절대로 이 3가지를 추구하면 안 된다. 그것 모두가 북한의 <entity>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북전략은 오직 하나뿐이다. 빼앗긴 북한 땅을 회수하는 일이요 북에서 시달리는 우리민족을 독재자의 손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다. 북한에는 헌법위에 노동당 규약이라는 상위법이 있다. 그 규약에 남조선해방을 통한 적화통일의 목표가 엄연히 성문화 되어 있는데, 우리가 그런 북한과 남북통일 평화통일을 한다는 것은 적화통일을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남북통일을 절대 반대한다. 김일성 일가 축출을 통한 북한해방 통일로 가야한다. 그래서 미국정부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 법치>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대한민국과의 한미동맹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이제 북한을 지도에서 지우자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그런 의지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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